호리 나오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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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리 나오요리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단고국 수호로 임명되었고, 에치고 우오누마군 사카도 2만 석을 받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서서 우에스기 유민 잇키 진압에 공을 세웠으며,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활약했다. 나가오카와 무라카미의 번주를 역임하며 영지를 다스렸고, 만년에 은거하여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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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 나오요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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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호리 씨 |
이름 | 호리 나오요리 |
![]() | |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덴쇼 5년 ( 1577년 ) |
사망 | 간에이 16년 6월 29일 ( 1639년7월 29일 ) |
계명 | 능운원전단주태수철단종정대거사 |
묘소 | 알 수 없음 |
관위 | 종5위 하단고노카미 |
막부 | 에도 막부 외양 다이묘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호리 히데하루 → 다다토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 이에미쓰 |
번 | 에치고사카토 번 번주 → 시나노이야마 번 번주 → 에치고나가오카 번 번주 → 에치고 무라카미 번 번주 |
씨족 | 호리 씨 |
부모 | 아버지: 호리 나오마사, 어머니: 묘센인 |
형제자매 | 나오키요, 나오토모, 나오요리, 나오유키, 나오시게, 나오사토, 나오타다 |
배우자 | 정실: 마쓰다이라 지카키요의 딸 |
자녀 | 나오쓰구, 나오토키, 딸 (이케다 나가쓰네 정실) 딸 (오카베 유키타카 정실) |
번주 경력 | |
사카토 번 번주 (호리 가문) | 임기: 1598년 ~ 1610년 후임: 폐번 |
이야마 번 번주 (호리 가문) | 전임: 미나가와 히로테루 임기: 1610년 ~ 1616년 후임: 사쿠마 야스마사 |
에치고 나가오카 번 번주 (호리 가문) | 전임: 미나가와 히로테루 임기: 1616년 ~ 1618년 후임: 마키노 다다나리 |
무라카미 번 번주 (호리 가문) | 전임: 무라카미 다다카쓰 임기: 1618년 ~ 1636년 후임: 호리 나오쓰구 대수: 1 |
2. 생애
1590년(덴쇼 18년), 호리 히데마사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히데하루는 어렸기에, 가독 상속이 지연되었다. 이때 가로였던 나오요리의 아버지 나오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나오요리를 보내 직소했다. 나오마사는 "히데마사가 전사했으니, 어린 아들 히데하루가 가독을 잇게 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이는 신하의 죄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나오요리는 13세였다. 히데요시는 히데하루의 상속을 인정하고, 나오요리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종5위하 단고 수호에 임명했다.[2]
1598년(게이초 3년), 호리 가문은 에치젠기타노쇼 성에서 에치고가스가야마 성으로 이봉되었다. 나오요리는 "나이 든 아버지를 돕기 위해 3년의 휴가를 주십시오"라고 히데요시에게 청했다. 히데요시는 "단고노카미(나오요리)는 그릇이 큰 인물이니, 부친과 함께 국정을 맡아야 한다"며 허락하고, 에치고 우오누마군사카도성 2만 석(사카도 번)을 주었다.[2]
히데요시 사후, 아이즈의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자, 나오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고했다.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토벌을 결정하자, 호리 가문에도 "쓰가와 방면에서 아이즈로 진격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가문 내 논의에서 나오요리는 히데요시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우에스기, 이시다 미쓰나리와 협력할 것을 주장했으나, 결국 호리 가문은 도쿠가와 측에 가담했다.[2]
1600년 8월 1일, 에치고 국내에서 우에스기 유민 잇키가 발발하자 나오요리는 이를 진압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 부자로부터 감장을 받았다.[1]
1602년, 호리 치카요시의 가출과 그의 양자 쓰루치요의 요절로 조도번이 폐번되자, 나오요리는 사카도와 조도지를 겸임하며 5만 석을 영유했다. 그는 시나노강 침식으로 나가오 다메카게가 축성한 조도지 대신 상류에 나가오카 축성 계획을 세웠으나, 1610년 에치고 후쿠시마 소동으로 시나노국 이이야마번 4만 석으로 전봉되어 중단되었다.[1]
게이초 16년(1611년), 스루가 성 화재 당시 공을 세워 미노 국 타기 군에 1만 석을 추가로 받았다.[1]
오사카 여름 전투에 참전하여 카타야마 전투에서 고토 모토츠구 부대를 격파하는 등 군공을 세웠다.[1]
겐나 2년(1616년) 4월 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종 직전 나오요리에게 도도 다카토라와 이이 나오타카를 각각 장군 1, 2진으로 삼고, 자신은 양 진영 사이에 대비하여 적을 격파하라는 유언을 남겼다.[1]
1616년 10월, 나가오카 영주가 되어 니가타 정의 세금을 면제하는 등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1]
1618년, 에치고 무라카미 번 10만 석으로 전봉되었다. 나가오카 성은 완공 직전에 마키노 다다나리에게 인계되었고, 마키노 씨는 1657년까지 나오요리의 제도를 답습했다.[1]
무라카미 입부 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받은 백만 석 어묵지를 두고 로주와 실랑이를 벌인 끝에 무라카미 성 증개축, 무사 계급 증원, 료운인 건립, 시노바즈노이케 조성 등에 사용했다.[1]
나오요리의 저택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이에미쓰 부자가 방문했다. 간에이지 창건에 기여하고, 우에노 대불을 건립했다. 다쿠앙 소팽의 사면에도 힘썼다.[1]
1636년(간에이 13년), 환갑을 맞아 은거하여 "텟단(철단)"이라 칭하고 가노 탄유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5] 1638년 아들 나오쓰구가 사망하고 손자 나오사다가 가독을 이었다.
1639년(간에이 16년) 6월 29일, 고마고메의 별저에서 향년 63세로 병사했다. 친구 다쿠앙으로부터 "료운인덴젠 단슈 타이슈 텟단 소쿠 테이 거사"라는 추호를 받았다.[1]
1642년 손자 나오사다가 요절하여 적류는 단절되었으나, 차남 나오토키 계열의 무라마쓰번은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했다.
2. 1.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1590년(덴쇼 18년), 호리 히데마사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 히데하루가 어렸기 때문에 가독 상속이 지연되었다. 이때 가로였던 나오요리의 아버지 나오마사는 나오요리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 직소했다. 나오마사는 "히데마사가 전사했으니, 어린 아들 히데하루가 가독을 잇게 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이는 신하의 죄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나오요리는 13세였다. 히데요시는 히데하루의 상속을 인정하고, 나오요리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종5위하 단고 수호에 임명했다.[2]1598년(게이초 3년), 호리 가문은 에치젠기타노쇼 성에서 에치고가스가야마 성으로 이봉되었다. 나오요리는 "나이 든 아버지를 돕기 위해 3년의 휴가를 주십시오"라고 히데요시에게 청했다. 히데요시는 "단고노카미(나오요리)는 그릇이 큰 인물이니, 부친과 함께 국정을 맡아야 한다"며 허락하고, 에치고 우오누마군사카도성 2만 석을 주었다(사카도 번).[2]
히데요시 사후, 아이즈의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자, 나오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보고했다.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토벌을 결정하자, 호리 가문에도 "쓰가와 방면에서 아이즈로 진격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가문 내 논의에서 나오요리는 히데요시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우에스기, 이시다 미쓰나리와 협력할 것을 주장했으나, 결국 호리 가문은 도쿠가와 측에 가담했다.[2]
2. 2. 우에스기 유민 잇키 진압
1600년 8월 1일, 에치고 국내에서 우에스기 유민 잇키가 발발했다. 잇키 세력에 의해 시모쿠라성이 함락되었고, 성주 오구라 마사히로가 전사했다. 나오요리는 시모쿠라성을 공격하여 다음 날 탈환했고, 전후에 이에야스와 히데타다 부자로부터 감장을 수여받았다. 9월 1일, 이에야스로부터 서장이 왔다. 이시다 미쓰나리 등이 미노의 오가키에 집결하고 있으니, 자신은 그쪽으로 출마한다는 내용과 아이즈의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사카토 방면으로 침공하는 경우, 사나다 노부유키, 혼다 야스시게, 히라이와 지카요시, 마키노 야스나리에게 원병을 내도록 명령했으니, 이들 제장과 협력하여 성을 굳게 지키라는 내용이었다.[1]9월 8일, 나오요리는 아버지 나오마사, 형 나오키요와 함께 산조성에서 쓰가와를 향해 병사를 출동시켰다. 쓰가와로 향하던 도중, 아이즈의 병사 3000여 명과 함께 잇키 병사들이 고지에 올라가 3단으로 진을 치고, 깊은 밭을 앞에 두고 대비하고 있었다. 이를 본 나오요리는 가신들에게 "적이 깊은 밭을 앞에 두고 고지에서 대비하고 있으니, 싸워도 반드시 패배할 것이다. 몰래 샛길로 적의 옆구리를 쳐서 무너뜨리면,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라고 말하며, 측근 병사 10명 정도와 함께 벼랑 그림자로 돌아 적의 오른쪽 옆에서 덮쳐 총을 쏘고 적을 무너뜨린 후 이를 평정했다.[1]
2. 3. 나가오카 성 축성 계획과 좌절
1602년, 주군 호리 히데하루의 동생이자 에치고 조도지성 성주 호리 치카요시는 나오요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국정을 돌보지 않는 형 히데하루에게 불만을 품고 가출했다. 치카요시는 조카이자 히데하루의 차남 쓰루치요를 양자로 삼아 조도지 성주로 삼았다. 나오요리는 쓰루치요를 보좌했고, 쓰루치요가 요절하여 조도번이 폐번되자 사카도와 조도지를 겸임하며 5만 석을 영유했다. 조도지는 나가오 다메카게의 동생 다메시게가 축성한 성이었지만, 시나노강 곁에 있어 해마다 침식이 진행되었기에, 상류의 오시마 쇼 헤이가타하라에 축성 계획을 세웠다. 이 지역이 나가오카로 불리게 된다.나가오카라는 이름이 문서에 등장하는 것은 1605년 조도 와타시 모리 요스케에게 나가오카 와타시로 장소를 변경하고, 지금까지와 같은 급여를 지급한다는 내용의 문서가 쓰루치요의 원로 신하 호리 카이노카미에게서 발급되었을 때이다. 이후 나가오카라는 이름은 문서에 자주 등장한다.
1608년, 아버지 사후 형 나오키요가 가문을 상속한 것에 불만을 품고 대립했다. 1610년, 전년 나오키요가 어린 군주 호리 타다토시에게 호소하여 나오요리를 추방했고, 이를 나오요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호소했기 때문에 나오키요와 타다토시는 개역(영지 몰수)되었고, 자신도 1만 석 감봉되었다. (에치고 후쿠시마 소동) 나오요리는 시나노국 이이야마번 4만 석으로 전봉되었고, 나가오카 축성은 중단되었다. 새로 다카다 번주가 된 마쓰다이라 타다테루의 가신 야마다 가쓰시게가 조도지 성주가 되었지만, 다카다성 축성 때문에 임지를 돌아볼 틈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1]
2. 4. 이에야스에 대한 충성과 오사카 전투
게이초 16년(1611년), 스루가 성 화재 당시 가장 먼저 달려가 보물과 금은을 옮기고 소화 작업에 나섰다. 그 공으로 미노 국 타기 군에 1만 석을 추가로 받았다.[1]오사카 여름 전투에 동생 나오유키와 함께 참전했다. 야마토 구치의 군장인 미즈노 카츠나리의 지휘 아래 참전하였는데, 5월 5일 카와치 국에 도착했을 때 마을 사람에게 지름길을 물었고, "카메세는 지름길이지만 모노노베노 모리야가 싸움에서 진 이후 불길한 길로 여겨진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내가 이 길로 나아가 적을 이기면 천 년 동안 이어진 어리석은 미신이 풀릴 것이다"라고 말하며 카메세를 넘어 진군했다.[1]
밤이 깊어지자 미즈노 카츠나리는 횃불이 많이 보이는 것을 보고 적의 공격을 경계하라는 전언을 보냈으나, "쳐들어오는 적이 어찌 횃불을 밝히겠는가. 저것은 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횃불이 모두 꺼지자 "이것은 적이다. 솜씨 좋은 자가 있어서 끄게 한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적장 고토 모토츠구의 부대였다.[1]
6일 새벽, 카타야마 전투에서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무너지는 것을 돕고 옆에서 쳐들어가 고토 모토츠구의 병사를 돌파했다. 이 격전에서 고토 모토츠구 등 여러 장수가 전사했다. 7일 덴노지·오카야마 전투를 거쳐 8일 오사카 성이 함락되며 전투는 종결되었다.[1]
겐나 2년(1616년) 4월 1일, 중병에 걸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불려가 오사카 전투에서의 군공을 칭찬받고, "내 죽은 후 만약 전란이 일어난다면, 도도 다카토라를 장군의 1진, 이이 나오타카를 2진으로 하고, 너는 양 진영 사이에 대비하여 옆에서 쳐서 적을 격파하라. 반드시 충의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유언을 받았다.[1]
2. 5. 나가오카 번, 무라카미 번주 시대
1616년 7월, 마쓰다이라 다다테루가 개역되면서 같은 해 10월에 나오요리는 3만 석이 증봉되어 나가오카의 영주가 되었고, 에치고 나가오카 번이 건립되었다. 나오요리는 축성과 함께 성하 마을 정비도 실시하였는데, 외항인 니가타 정(니가타항, 현재 니가타시 후루마치 부근)은 무역과 인구 증가를 고려하여 여러 세금을 면제함으로써 이후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1]1618년(겐나 4년), 2만 석이 증봉되어 에치고 무라카미 번 10만 석으로 전봉되었다. 나가오카 성은 완공 직전에 마키노 다다나리에게 인계되었다. 마키노 씨는 막부의 요직에 있었고, 1630년(간에이 7년)까지 나가오카에 입국할 수 없었던 점도 있어, 1657년(메이레키 3년)의 개정까지 관례라 칭하며 "호리 탄고노카미 어증문대로"로 나오요리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여 약간의 불편함도 없었다고 한다.[1]
나오요리가 무라카미에 입부할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백만 석의 녹을 준다는 어묵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를 제시하여 로주에게 백만 석을 청구하자, 로주는 곤란해했지만, 백만 석의 "석" 자에 벌레 먹은 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것은 백만 석이 아니라 백만 량일 것이다, 따라서 사도 금산을 앞으로 3년 동안 관할하게 하라"라고 명령하고 서둘러 떠났다. 이에 분노한 나오요리는 이 돈으로 무라카미 성을 증개축하고, 무사 계급을 증원했으며, 에도의 상옥에 료운인을 짓고 시노바즈노이케를 만들었다. 이후 거성의 개축과 무사 계급 증원에 대해 에도 막부의 추궁을 받았다. 또한, 무라카미 번주로서 무라카미 성하마을의 정비에 종사하여, 현재 시가지의 기초를 닦았다.[1]
2. 6. 만년
나오요리의 저택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이에미쓰 부자가 방문했다. 『간세이 중수 제씨보』에는 "간에이 6년 12월 26일 다이토쿠인덴(히데타다)이 나오요리의 저택에 방문하여, 조수쿠니의 어도(御刀) 사다무네의 와키자시와 황금 300량을 하사하고, 7년 2월 13일 다이유인덴(이에미쓰)이 나오요리의 집에 방문했을 때도, 조코의 어허리모노에 황금 200량을 은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겐나 연대, 우에노에는 나오요리의 저택 외에 도도 다카토라, 쓰가루 노부히라의 저택이 있었다. 쓰가루 가문의 『조후쿠지 어유래략기』에 따르면, "우에노는 어가(쓰가루 가문)와 더불어 도도 가문, 호리 가문의 저택이라고 말씀드리는 곳으로, 도쿠가와 가문에서 어묘지로 삼으실 때, 대체지를 통해 거두어들인 곳으로, 어가의 사원, 쓰랴쿠인, 도도 가문의 간쇼인, 호리 가문의 료운인은 각별히 대우하는 취지"라고 한다. 간에이 2년 (1625년) 덴카이의 발의로 간에이지가 창건되었고, 료운인은 우에노 최대의 돗추(탑두)였다. 나오요리는 그 외에도 기온도, 대불전 등을 기증했다.
간에이 4년 (1627년), 다쿠앙 소팽이 죄에 연루되었을 때, 덴카이나 야규 무네노리와 함께 사면을 위해 분주했다. 다쿠앙은 나오요리의 고마고메 별저에서 2년간 신세를 졌다. 간에이 8년 (1631년), 전사자 위령을 위해 우에노 간에이지에 우에노 대불 (석가여래 좌상)을 건립했다. 간에이 13년 (1636년), 환갑을 맞아 은거하여 적남 나오쓰구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자신은 "텟단(철단)"이라고 칭했다. 이 인생의 분기점에서 초상화 제작을 희망하거나, 혹은 다쿠앙 등으로부터 권유받아 가노 탄유가 그린 수(壽) 초상화가 남아있다[5]。 그러나 간에이 15년 (1638년)에 나오쓰구가 먼저 사망하고, 손자 나오사다가 가독을 이었다.
간에이 16년 (1639년) 6월 29일, 고마고메의 별저에서 병사했다. 향년 63세. 친구인 다쿠앙으로부터 "료운인덴젠 단슈 타이슈 텟단 소쿠 테이 거사"라는 추호(追號)를 받았다.
나오사다는 간에이 19년 (1642년)에 요절하고 적류는 단절, 무라카미번은 폐번되었지만, 3만 석을 분여받았던 차남 나오토키가 에치고 야스다에 진야를 짓고 야스다번을 입번, 후에 진야를 무라마쓰로 옮겨 에치고 무라마쓰번으로 개칭, 나오토키의 자손은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했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호리 나오마사 |
어머니 | 묘센인 |
정실 | 마쓰다이라 지카키요의 딸 |
장남 | 호리 나오쓰구 |
차남 | 호리 나오토키 |
장녀 | 이케다 나가쓰네 정실 |
차녀 | 오카베 유키타카 정실 |
참조
[1]
서적
枢要秘書
[2]
웹사이트
"絹本著色妙泉院像"
http://www.lalanet.g[...]
[3]
간행물
新潟県立歴史博物館 平成二十三年度 夏季企画展「越後の大名」ポスター
http://www.housen.or[...]
[4]
웹사이트
新潟県立歴史博物館 館蔵資料紹介
http://nbz.or.jp/?pa[...]
[5]
문서
堀直寄像
新潟県立歴史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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